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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정동윤 고문서 및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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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경 정동윤 고문서 및 유물은 정동윤과 그 후손들이 남긴 고문서, 고서, 묘지석 등 36점의 유물로, 18세기 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의 자료들을 포함한다. 이 유물들은 교지, 시권, 호구단자, 고서, 묘지석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 시대의 관직, 과거 제도, 신분 제도, 가족 구성, 가계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특히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금속활자본 3종을 포함한 고서들은 희귀성을 인정받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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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정동윤 고문서 및 유물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문화재 정보
이름문경 정동윤 고문서 및 유물
해당 이미지 male-ko.svg
해당 이미지
국가대한민국 경상북도
유형유형문화재
번호479
지정일2013년 8월 19일
주소경상북도 문경시 호계면 견탄리 150
시대조선시대
소유자정지홍
수량27매 4책 5점
지도대한민국
꼬리표문경 견탄리
문화재청21,04790000,37

2. 지정 내역

문경시 호계면에 대대로 살았던 경주인 정동윤(鄭東潤, 1696~1782)과 그 후손들이 남긴 교지(敎旨), 시권(試券), 호구단자(戶口單子), 고서(古書), 지석(誌石) 등 총 36점의 유물이 일괄적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9호로 지정되었다.[1] 지정된 유물은 고문서 27매, 고서 4책, 묘지석 5점으로 구성된다. 고문서는 주로 18세기 전반에서 19세기 후반에 작성된 것들이며, 고서 중에는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귀중한 금속활자본 3종(치평요람, 점필재정선청구풍아, 찬주분류두시)이 포함되어 있다. 이 유물들은 문경 지역의 중요 인물인 정동윤, 정경구(鄭庚九)와 관련되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고, 특히 임진왜란 이전 금속활자본은 비록 일부가 유실된 낙질(落帙) 상태이나 현존하는 판본이 매우 드물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1]

지정된 유물의 상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일련번호명칭재료구조·형식
·형태
규격(cm)수량기타 특징
유형
문화재
479
聞慶 鄭東潤
古文書 및 遺物
36點(고문서 27枚, 고서 4冊, 묘지석 5點)
-1)교지
(정동윤 홍패)
98cm×65cm1매옹정
13년(1735년)
유학(幼學) 정동윤
문과 병과(丙科) 26인
-2)교지
(정동윤 고신)
55cm×78cm1매건륭
8년(1743년)
조산대부(朝散大夫) 겸
연서도(延曙道) 찰방(察訪)
-3)교지
(정동윤 고신)
51cm×73cm1매건륭
38년(1773년)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龍
驤衛) 부호군(副護軍)
-4)교지(정동윤
고신)
54cm×75.5cm1매건륭
38년(1773년)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僉知
中樞府事)
-5)교지
(정동윤 고신)
54cm×75cm1매건륭
38년(1773년)
통정대부(通政大夫)
-6)교지(여씨
추증)
56cm×80cm1매건륭
38년(1773년)
정동윤 처:
여씨 숙부인(淑夫人)으로 추증
-7)교지
(정동윤 고신)
54cm×75cm1매건륭
40년(1775년)
가선대부(嘉善大夫)
-8)교지
(정동윤 고신)
53cm×79cm1매건륭
41년(1776년)
가의대부(嘉義大夫)
-9)교지
(정경구 백패)
86cm×47cm1매도광
11년(1831년)
생원 삼등(三等)
33인
-10)시권70cm×108cm1매강경(講經) (사서삼경)
시권
-11)시권70.5cm×291cm1매독서여련단부(讀書如鍊丹賦)
(2장으로 분리됨)
-12)시권76cm×154cm1매예의(禮義)
군자재거즉문
난화지(君子在車則聞
鸞和之)
-13)호적단자(戶籍單子)54.5cm×56cm1매건륭
12년(1746년)
-14)호적단자(戶籍單子)56.5cm×52cm1매건륭
20년(1755년)
-15)호적단자(戶籍單子)60cm×42cm1매건륭
26년(1761년)
-16)준호구(准戶口)57cm×40cm1매건륭
36년(1771년)
-17)준호구(准戶口)54cm×42cm1매건륭
36년(1771년)
-18)호적단자(戶籍單子)55cm×39cm1매건륭
38년(1773년)
-19)호적단자(戶籍單子)55cm×43cm1매건륭
39년(1774년)
-20)호구단자(戶口單子)41cm×62.5cm1매도광
2년(1822년)
정민행(鄭敏行): 정경구
초명(初名)
-21)호구단자(戶口單子)47cm×57cm1매도광
7년(1827년)
-22)호적단자(戶籍單子)52.5cm×70cm1매도광
14년(1834년)
-23)호적단자(戶籍單子)45.5cm×72cm1매도광
14년(1834년)
-24)호적단자(戶籍單子)53cm×74cm1매도광
17년(1837년)
-25)호적단자(戶籍單子)39cm×54cm1매도광
20년(1840년)
-26)호적단자(戶籍單子)55.5cm×61cm1매도광
23년(1843년)
-27)준호구(准戶口)49cm×36.7cm1매건륭
39년(1774년)
정언심(鄭彦諶): 정동윤
차남(次子)
-28)을묘식년문무과방목
(乙卯式年文武科
榜目)
芸閣印書體
29cm×17cm1책1735년四周雙邊, 半郭
21cm×13.4cm,
有界,
10行19字,
上白魚尾
-29)치평요람(治平要覽) (권29)금속
활자본
28.5cm×19cm1책1516년四周雙邊, 半郭
22.6cm×14.8cm,
有界,
12行21字,
黑口,
內向三葉花紋
魚尾
-30)점필재정선청구풍아
(佔畢齋精選靑丘
風雅) (권1-3)
금속
활자본
29.5cm×19.5cm1책16세기
중엽
四周單邊, 半郭
23.2cm×15.3cm,
有界,
11行20字,
內向三葉花紋
魚尾
-31)찬주분류두시
(纂註分類杜詩)
(권8-9)
금속활자본30cm×20cm1책1523년四周雙邊, 半郭
22.6cm×15.6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內向三葉花紋
魚尾
-32)지석(誌石) (정동윤)자기평판(平板)120cm×170.5cm
×20cm
1점고종 갑신년
(1904년)
-33)지석(誌石) (정경구)자기평판(平板)120cm×175cm×
20cm
1점고종 갑신년
(1904년)
-34)지석(誌石) (정언태(鄭彦台))자기평판(平板)120cm×170.5cm
×20cm
1점고종 갑신년
(1904년)
-35)지석(誌石) (순천 김씨)자기평판(平板)100.5cm×170.5cm
×20cm
1점고종 갑신년
(1904년)
정복형(鄭復亨, 정언태
子)의 처(妻)
-36)지석(誌石) (풍산 류씨)자기평판(平板)100.5cm×170cm
×20cm
1점고종 갑신년
(1904년)
정여필(鄭汝弼, 정복형
子)의 처(妻)


2. 1. 고문서

문경 정동윤 고문서 및 유물에 포함된 고문서는 총 27매로, 정동윤과 그의 후손들과 관련된 기록이다. 이 고문서들은 크게 교지(敎旨), 시권(試券), 호구단자(戶口單子) 및 관련 문서로 나눌 수 있으며, 조선 시대의 관직 제도, 과거 제도, 신분제도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교지는 정동윤이 1735년 (영조 11년) 문과에 급제하여 받은 홍패(紅牌)를 시작으로, 관직 생활 중 받은 여러 점의 고신(告身)과 그의 부인 의령 여씨숙부인(淑夫人)으로 추증된 교지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후손인 정경구가 1831년 (순조 31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받은 백패도 있어, 가문의 관직 진출 역사를 보여준다.

과거 시험 답안지인 시권은 총 3점이 남아있다. 이는 당시 선비들이 응시했던 시험의 종류와 내용, 평가 방식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실물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호구단자 및 준호구와 같은 호적 관련 문서는 1746년부터 1843년까지 약 100년에 걸쳐 작성된 15점이 포함되어 있다. 이 문서들을 통해 조선 후기 양반 가문의 가족 구성, 노비 소유 실태, 신분 변동 등 당시 사회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정동윤 가문의 고문서들은 한 가문의 기록을 넘어, 조선 시대의 사회·문화적 측면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2. 1. 1. 교지 (敎旨)

정동윤 관련 교지는 총 8점이며, 그의 관직 생활과 관련된 중요한 기록이다. 첫 교지는 1735년 (영조 11년) 문과에 급제했을 때 받은 홍패(紅牌)이며, 나머지는 관직 임명 및 품계 상승에 따라 받은 고신(告身)이다. 특히 1773년 (영조 49년)에는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통정대부 등 여러 관직과 품계를 받았으며, 그의 부인 의령 여씨 역시 숙부인(淑夫人)으로 추증되는 교지를 받았다. 이는 정동윤이 꾸준히 관직 생활을 이어가며 높은 품계에 올랐음을 보여준다.

정동윤 및 부인 여씨 관련 교지 목록은 다음과 같다.

연도 (조선/청 연호)내용비고
1735년 (영조 11년 / 옹정 13년)유학(幼學) 정동윤, 문과 병과(丙科) 26위 급제홍패
1743년 (영조 19년 / 건륭 8년)조산대부(朝散大夫) 겸 연서도(延曙道) 찰방(察訪) 임명고신
1773년 (영조 49년 / 건륭 38년)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 임명고신
1773년 (영조 49년 / 건륭 38년)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임명고신
1773년 (영조 49년 / 건륭 38년)통정대부(通政大夫) 임명고신
1773년 (영조 49년 / 건륭 38년)정동윤의 처 의령 여씨숙부인(淑夫人)으로 추증추증 교지
1775년 (영조 51년 / 건륭 40년)가선대부(嘉善大夫) 임명고신
1776년 (정조 즉위년 / 건륭 41년)가의대부(嘉義大夫) 임명고신


2. 1. 2. 시권 (試券)

시권(試券)은 조선 시대 과거 시험에서 응시자가 제출했던 답안지를 말한다. 문경 정동윤 고문서 및 유물에는 총 3점의 시권이 포함되어 있어, 당시 과거 시험의 운영 방식과 평가 기준 등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된다.

각 시권의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강경(講經) 시권: 사서삼경과 같은 유교 경전의 내용을 풀이하는 강경 시험의 답안지이다. 크기는 70cm × 108cm이다.
  • 부(賦) 시권: '독서여련단부(讀書如鍊丹賦, 책 읽기를 연단술처럼 하라)'라는 주제로 작성된 부(賦) 형식의 답안지이다. 원래 한 장이었으나 현재는 두 장으로 분리된 상태이며, 크기는 70.5cm × 291cm이다.
  • 의(義) 시권: '예의(禮義) 군자재거즉문 난화지(君子在車則聞 鸞和之, 군자가 수레를 타면 방울 소리를 듣는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의(義) 시험의 답안지이다. 크기는 76cm × 154cm이다.


이 시권들은 정동윤 혹은 그의 후손들이 실제 응시했던 과거 시험의 결과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 선비들의 학문 수준과 과거 제도의 구체적인 모습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2. 1. 3. 호구단자 (戶口單子)

호구단자(戶口單子)는 조선 시대에 호적 작성을 위해 각 가호(家戶)에서 작성하여 관아에 제출하던 문서이다. 문경 정동윤 고문서 및 유물에는 정동윤 본인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과 손자 대에 걸쳐 여러 시기에 작성된 호구 관련 문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 문서들은 당시 양반 가문의 가족 구성, 노비 소유 실태, 신분 변동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유물 중 호구 관련 문서는 다음과 같다.

명칭제작 연도규격(cm)수량비고
호적단자(戶籍單子)건륭 12년 (1746년)54.5×561매
호적단자(戶籍單子)건륭 20년 (1755년)56.5×521매
호적단자(戶籍單子)건륭 26년 (1761년)60×421매
준호구(准戶口)건륭 36년 (1771년)57×401매호적 등본에 해당
준호구(准戶口)건륭 36년 (1771년)54×421매호적 등본에 해당
호적단자(戶籍單子)건륭 38년 (1773년)55×391매
호적단자(戶籍單子)건륭 39년 (1774년)55×431매
호구단자(戶口單子)도광 2년 (1822년)41×62.51매정경구(鄭庚九)의 초명 정민행(鄭敏行) 시절 작성
호구단자(戶口單子)도광 7년 (1827년)47×571매
호적단자(戶籍單子)도광 14년 (1834년)52.5×701매
호적단자(戶籍單子)도광 14년 (1834년)45.5×721매
호적단자(戶籍單子)도광 17년 (1837년)53×741매
호적단자(戶籍單子)도광 20년 (1840년)39×541매
호적단자(戶籍單子)도광 23년 (1843년)55.5×611매
준호구(准戶口)건륭 39년 (1774년)49×36.71매정동윤의 차남 정언심(鄭彦諶) 관련, 호적 등본에 해당



이 문서들은 1746년부터 1843년까지 약 100년에 걸쳐 작성된 것으로, 정동윤 가문의 구성원 변화, 거주지, 노비 소유 현황 및 변동 사항 등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정경구가 초명인 정민행으로 기록된 문서나, 차남 정언심의 분가(分家) 정황을 보여주는 준호구 등은 가계 연구에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귀중한 사료이다.

2. 2. 고서 (古書)

문경 정동윤 고문서 및 유물에는 총 4책의 고서가 포함되어 있다.[1] 이 중 『치평요람(治平要覽)』, 『점필재정선청구풍아(佔畢齋精選靑丘風雅)』,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 3종은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금속활자본이다.[1] 이 금속활자본들은 비록 일부가 손실된 낙질본(落帙本) 상태이지만, 현재 전해지는 판본이 매우 희귀하여 서지학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1]

나머지 한 책은 1735년에 간행된 『을묘식년문무과방목(乙卯式年文武科榜目)』이다.[1]

이 고서들은 정동윤 관련 고문서, 묘지석 등과 함께 일괄(36점)하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9호로 지정되었다.[1]

2. 2. 1. 『을묘식년문무과방목(乙卯式年文武科榜目)』

『을묘식년문무과방목(乙卯式年文武科榜目)』은 1735년(영조 11년)에 시행된 과거 시험의 합격자 명단을 수록한 책이다. 이 책은 정동윤이 문과 병과(丙科) 26등으로 급제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운각인서체자본(芸閣印書體字本)으로 간행되었으며, 크기는 세로 29cm, 가로 17cm이다. 책의 형태적 특징으로는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크기 세로 21cm 가로 13.4cm, 유계(有界), 10행 19자, 상백어미(上白魚尾) 등이 있다.

2. 2. 2. 『치평요람(治平要覽)』

세종 때 정인지 등이 왕명을 받아 역대 사적에서 정치에 귀감이 될 만한 사실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조선 전기 정치 사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정동윤 고문서 및 유물에 포함된 『치평요람』은 총 30권 중 권29 1책이다. 1516년(중종 11년)에 간행된 금속 활자본이며, 크기는 세로 28.5cm, 가로 19cm이다. 판본의 형태적 특징으로는 사방 테두리가 두 줄인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크기는 세로 22.6cm, 가로 14.8cm이며, 계선(界線)이 있고, 한 면에 12행 21자로 구성되어 있다. 판심(版心)의 물고기 꼬리 문양인 어미(魚尾)는 안쪽을 향한 세 개의 잎사귀 무늬(內向三葉花紋魚尾) 형태이며, 판심 아랫부분의 책 제목인 하흑구(下黑口)가 특징이다.

2. 2. 3. 『점필재정선청구풍아(佔畢齋精選靑丘風雅)』

『점필재정선청구풍아(佔畢齋精選靑丘風雅)』는 김종직신라 말부터 조선 초까지 활동한 126명의 시인들의 시 503수를 직접 선정하여 엮은 시선집이다. 문경 정동윤 고문서 및 유물에 포함된 것은 권1~3에 해당하는 1책으로, 16세기 중엽에 간행된 금속활자본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세로 29.5cm, 가로 19.5cm이며, 판식은 사주단변(四周單邊)이고 반곽(半郭)의 크기는 세로 23.2cm, 가로 15.3cm이다. 유계(有界)이며, 한 면에 11행 20자로 구성되어 있고, 어미(魚尾)는 내향삼엽화문어미(內向三葉花紋魚尾) 형태를 띤다. 이 책은 조선 전기 문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2. 2. 4.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

시인 두보의 시집에 주석을 달아 분류한 책이다. 조선 전기 시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문경 정동윤 고문서 및 유물에 포함된 것은 권8~9에 해당하는 1책이다. 1523년에 간행된 금속활자본으로, 크기는 세로 30cm, 가로 20cm이다. 책의 판형은 사주쌍변(四周雙邊)이고, 반곽(半郭)의 크기는 세로 22.6cm, 가로 15.6cm이다. 계선(有界)이 있으며, 한 행에 20자씩 총 10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석은 쌍행(雙行)으로 달려 있다. 어미(魚尾)는 내향삼엽화문어미(內向三葉花紋魚尾) 형태이다.

2. 3. 묘지석 (墓誌石)

총 5점의 묘지석이 있으며, 모두 고종 갑신년(1904년)에 제작된 자기 평판이다. 각 묘지석의 대상 인물과 관련 정보는 다음과 같다.

대상 인물재료형태규격(cm)제작 연도비고
정동윤(鄭東潤)자기평판120×170.5×201904년 (고종 갑신년)
정경구(鄭庚九)자기평판120×175×201904년 (고종 갑신년)
정언태(鄭彦台)자기평판120×170.5×201904년 (고종 갑신년)정동윤(鄭東潤)의 차자(次子)
순천 김씨(順天金氏)자기평판100.5×170.5×201904년 (고종 갑신년)정복형(鄭復亨, 정언태의 아들)의 처(妻)
풍산 류씨(豊山柳氏)자기평판100.5×170×201904년 (고종 갑신년)정여필(鄭汝弼, 정복형의 아들)의 처(妻)


3. 유물의 가치와 의의

문경시 호계면에 대대로 살아온 경주 정씨 정동윤(鄭東潤, 1696~1782)과 그 후손들이 남긴 교지(敎旨), 시권(試券), 호구단자(戶口單子), 고서(古書), 지석(誌石) 등을 포함하는 일괄 유물은 중요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다.[1] 이 자료들은 주로 18세기 전반부터 19세기 후반에 걸쳐 작성된 것들로, 당시의 사회상과 특정 가문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1]

특히 유물 중 고서에는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금속활자본 3종(치평요람(治平要覽), 점필재정선청구풍아(佔畢齋精選靑丘風雅),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이 포함되어 있어 주목받는다. 이 책들은 비록 일부 내용이 소실된 상태이지만, 현존하는 판본이 매우 희귀하여 학술적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1] 또한, 정동윤과 정경구(鄭庚九)는 문경 지역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며, 이들과 관련된 고문서 역시 그 자체로 문화재로서의 의미를 갖는다.[1]

이러한 역사적, 학술적, 문화적 가치를 종합적으로 인정받아 고문서 27매, 고서 4책, 묘지석 5점을 포함한 총 36점의 유물이 일괄적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1]

3. 1. 조선시대 사회상 연구

문경시 호계면에 대대로 살았던 경주인 정동윤(鄭東潤, 1696~1782)과 그의 후손들이 남긴 교지(敎旨), 시권(試券), 호구단자(戶口單子), 고서(古書), 지석(誌石) 등의 유물들은 조선 후기의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1] 이들 고문서는 주로 18세기 전반에서 19세기 후반에 걸쳐 작성된 것들이다.[1]

특히 고서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금속활자본 3종이다. 첫째는 세종 때 정인지 등이 역대 역사 기록에서 정치에 귀감이 될 만한 사실들을 모아 엮은 『치평요람』(治平要覽)이다. 둘째는 김종직이 신라 말부터 조선 초까지 활동한 시인 126명의 시 503수를 직접 골라 간행한 『점필재정선청구풍아』(佔畢齋精選靑丘風雅)이다. 셋째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집에 대한 주석서인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이다.[1] 이 책들은 비록 일부 내용이 빠진 상태(낙질본)이기는 하지만, 현재까지 전해지는 판본이 매우 드물어 사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1]

정동윤과 정경구(鄭庚九)는 문경 지역에서 주목받는 인물이었으며, 이들과 관련된 고문서 역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1]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받아 고문서 27매, 고서 4책, 묘지석 5점을 포함한 총 36점의 유물이 일괄적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1]

3. 2. 경주 정씨 가문 연구

문경시 호계면에 세거하던 경주 정씨 정동윤(鄭東潤, 1696년 ~ 1782년)과 그 후손들이 남긴 유물은 해당 가문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1] 이 유물들은 교지(敎旨), 시권(試券), 호구단자(戶口單子), 고서(古書), 지석(誌石)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고문서는 18세기 전반에서 19세기 후반에 걸쳐 작성된 것들이다.[1]

정동윤과 정경구(鄭庚九)는 문경 지역에서 주목받는 인물로 평가되며, 이들과 관련된 고문서는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1] 또한, 유물 중 고서에는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금속활자본 3종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세종정인지 등이 편찬한 『치평요람(治平要覽)』, 김종직이 신라 말부터 조선 초까지의 시 503수를 선별하여 엮은 『점필재정선청구풍아(佔畢齋精選靑丘風雅)』, 그리고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집 주석서인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이다. 이 책들은 비록 일부가 유실된 낙질본(落帙本) 형태이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판본이 매우 희귀하여 사료적 가치가 크다.[1]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고문서 27매, 고서 4책, 묘지석 5점 등 총 36점의 유물이 일괄적으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1]

3. 3. 희귀 금속활자본 연구

문경 정동윤 고문서 및 유물에 포함된 고서 가운데,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금속활자본 3종은 다음과 같다.[1]

  • '''치평요람''': 세종정인지 등이 역대 사적에서 정치에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 '''점필재정선청구풍아''': 김종직이 신라 말부터 조선 초까지 시인 126명의 시 503수를 직접 골라 엮은 시선집이다.
  • '''찬주분류두시''':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집에 주석을 달고 분류한 책이다.


이 세 종류의 책은 모두 금속활자로 인쇄되었으며, 비록 일부가 소실된 낙질본 형태이지만 현존하는 판본 자체가 매우 드물어 희귀성을 인정받는다.[1] 따라서 이 금속활자본들은 조선시대 인쇄 기술의 발달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1]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다른 고문서, 묘지석 등과 함께 일괄(36점: 고문서 27매, 고서 4책, 묘지석 5점)하여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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